Friday, February 24, 2012

허울뿐인 객관성은 가라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View.html?idxno=28079


[언론다시보기] 변상욱 CBS 대기자


2012년 02월 22일 (수) 15:44:05


저널리즘의 사명이자 주요 기능 중 하나가 환경에 대한 감시이다. 권력과 자본으로 대표되는 힘이 남용되거나 부적절하게 사용되지 않도록 감시하고 견제하고 고발하는 것이 민주공화체제 저널리즘의 임무이다. 그 임무는 취재 보도를 통해 사실과 진실을 드러내고 논평을 통해 문제를 지적하며 대안과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수행한다. 

그러나 정치·사회적 진실은 몇 겹의 장벽에 의해 가려져 있고 그리로 접근하는 길은 책략에 의해 숨겨져 있다. 언론이 진실을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이고 실패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널리즘에서는 심층에 이르기 위해 비평과 폭로, 탐사 등 보다 전문적인 기능을 키우려 노력해 왔다. 

그러나 비평과 폭로, 탐사 보도를 막아서며 제기되는 문제가 객관성과 공정성이다. 우리는 그 대표적인 예로 PD수첩의 광우병 보도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언론은 객관적 설명만 하고 판단은 독자가 하도록 한다’는 나름 설득력 있는 명제가 우리를 제한해 왔다. 이를 바탕으로 객관주의 내지는 계량주의 언론 시대가 오래도록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계량주의와 객관주의에 함몰된 보도는 비본질적 보도로 진실을 회피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고전적으로도 객관성과 공정성은 양측을 동등하게 다루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계량주의 언론의 종주국인 미국마저도 FCC나 편집 규약 등에는 공정하면서도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나름의 원칙과 장치들을 강조해 왔다. 

‘1. 해석과 판단의 요건 △광범위한 의견을 수렴한다. △각 견해의 진실성과 비중을 따져 판단한다.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수렴한다.’ 
두 번째 항목인 각 견해의 진실성과 비중을 고려하라는 내용이 바로 산술적이고 기계적인 중립, 진부한 양시양비론을 피하라는 충고이다.

‘2. 공정성의 유지 △사실은 신성불가침이다. △산술적 균형을 지양한다. △모호한 중립과 초연함은 배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여당이 주장한 것 한 줄에 야당이 주장한 것 한 줄이면 객관성을 확보했고 균형이 맞았다고 여기며 기사를 써왔다. 여당은 1곳뿐이고 야당은 여럿이므로 야당의 논평과 주장을 모두 인용하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여겨 야당 논평은 뭉뚱그려 쓰기도 했다. 

그러나 정당의 대변인은 근거 없는 폭로를 뻔뻔스러운 얼굴로 꺼내 놓는다. 사실을 은폐하며 거짓을 말하기도 한다. 최근의 예로 새누리당 돈봉투 사건의 당사자 가운데 비리 의혹이 일었을 때 처음부터 사실대로 이야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국회의장이고 대통령실 수석임에도 모든 것을 감추고 따돌렸다. 그 밑의 비서관들도 모두 궁지에 몰리자 하나씩 꺼내 놓았다. 기자들은 그저 거짓말을 순서대로 따라가며 당사자의 처분만을 기다려야 했다. 실제로 우리의 보도를 살피면 기자들은 그 말이 거짓이건, 아니건 좀처럼 문제 삼지 않는다. 박희태의 해명을 땄으면 되고, 김효재의 목소리를 담아냈으면 충분하다는 태도들로 대부분 일관하고 있다. 

정말 그 인물이 그 자리에서 분명히 그렇게 말했고 기자는 들은 대로 썼으니 기자는 역할을 다한 것일까? 과연 데스크에게 정당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을까? 아니 데스크가 요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독자와 시청취자에게 당당히 최선을 다했다 주장할 수 있는 걸까? 그 인물들의 발언을 분석과 추측을 통해, 논리적 추론에 의해 반박하고 의심하며 기사에 반영하면 부적절한 저널리즘에 빠지는 걸까? 

총선 국면에 접어들면서 가장 시급한 것은 이런 보도 태도의 반성이라 여겨진다. 득표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해주겠다고 허언을 쏟아놓는 여야 공약과 폭로비방에 대해 최소한 받아쓰기를 넘어서는 책임있는 보도를 해야 한다. 진실성과 현실성을 가능한 선까지 검증해야 한다. 분명히 이야기 했으니 받아 적고 여당 것을 써줬으니 야당 것도 써주면 된다고? 형식적 객관성은 확보했는지 모르지만 기사는 진실로부터 멀어진다. 이것만은 아닐 것이다. 

어떤 결론에 이르든 좋다. 이제 이 모든 것들에 의문을 가져 보자. 그러라고 배우고 지시 받은 것에 대해 의심해 보자. 고민한 다음 기자의 양식에 따르면 된다. 진정으로 고민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