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February 13, 2014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보고…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보고…




이 영화가 갖고 있는 많은 내재적 이야기가 있겠지만, 내가 이 영화를 바라보는 관점은 죽음이다.
꽃보다 아름다운 때의 죽음...


이 봄에 초등학년 4학년과 1학년이 될 아들 둘을 두고 있다.
첫째 아들은 박사학위를 받기 직전인 2004년 3월에 태어났다.
그해 여름 박사학위를 받고 직장을 잡은 후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그 아이는 '소변 역류'라는 병을 앓고 있었고 이것 때문에 정기검진을 받기 위해 어린이 병원에서 초음파 검사를 받는 도중 우연히 '신경모세포종(neuroblastoma)'이라는 소아암 진단을 받았다.


아이가 10개월 때인 2005년 1월 소아암 1기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아이가 2살하고 1개월 때인 2006년 4월 3기 진단을 받고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직후인 2007년 10월 소아암 4기 진단을 받았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당시의 절망감.
아이를 먼저 보낼 수도 있다는 두려움.
직업은 있었지만 막 귀국을 했기에 대출도 불가능했던 당시 상황에서 치료비 걱정은 어쩌면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부모님은 큰 아이를 위해 집을 내주셨고,
처가집은 젖도 못뗀 둘째 아이를 키워주셨으며,
주변분들은 십시일반으로 병원비를 모아주셨고 기도해주셨다.
수술, 항암치료, 방사선치료, 조혈모세포 이식 등 죽을 고비 넘어가며 2년 동안 치료를 받았다.


아이가 치료를 받는 동안 늘 두려움에 휩싸였다.
아이가 떠날 수도 있다는 공포는 무의식 중에 더 처절했고 그래서 더 일에 몰두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공포와 멀어질 수 있으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2014년.
여전히 공포의 기억은 생생하다.
이런 이유로 신문이나 방송, 영화 심지어 뉴스까지도 그 어떤 죽음이나 고통에 관한 내용은 일부러 피한다. 그래서 도가니를 읽지도 보지도 않았으며, 나영이 사건은 모른 척한다. 아이에 관한 고통은 여전히 내 자신에게 투영되어 똑같은 고통을 느낀다. 망각이라는 인간의 속성은 왜 이 기억을 없애지 못하는지…


이 영화가 갖는 많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의미 중 하나를 이렇게 말하려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안된다.”


유미는 나 그리고 내 아이이고, 황상기는 내 아버지 그리고 나이다.
유미의 죽음은 나와 내 가족의 죽음이고, 그 고통은 고스란히 나와 우리의 몫이다.
게다가 그 죽음이 억울함과 함께 한다면 그 죽음의 그리고 살아있는 자의 삶의 의미는 대체 무엇인란 말인가?
이렇게 유미를 보낸 유미 가족은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아프지 않게 해야 하고, 죽지 않게 해야 하며,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면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 모두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게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또 다른 유미와 황상기가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게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았으면 좋겠다.
치부일 수도 있는 내 개인사를 통한 소개가 조금이라도 이 영화의 홍보가 되기를 바란다.


1. 영화 감상으로 귀국인사를 대신합니다.
앞으로 자주 뵙겠습니다.


2. 광운대 학생은 이 영화 보시고 제 연구실로 오시면 영화비 그대로 돌려드리고 맛있는 커피 한잔 대접하겠습니다.